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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한이야기,
세상에는 뱃 속에 짐승이 한 마리씩 들어앉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짐승끼리는 아주 작은 단서만으로도 서로를 알아본다. 애초부터 내부 구조가 그냥 그런거다. 굳이 시각적인 형태로 표현하자면 벌집 같은 모양일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백열등 하나로 간신히 밝힌 회사 창고 안에서, 언니는 울었고 대화는 간간히 이어졌지만 우리는 서로가 무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인정했다.

_

어릴 때는 '좋아하는 감정'보다 '사랑'이 더 상위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좋아하는 감정'이 커지면 '사랑'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쯤이었나, 사랑하면서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할머니 때문에 알게 됐다. 나는 본능적으로 할머니를 사랑하지만, 손톱만큼도 좋아할 수는 없었다. 좋아할 수 없는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이유는 피붙이라는 거, 본능, 그거 하나 때문이었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주기보다는 좋아해주기를 더 바라는 것 같다.

_

며칠 전 점심 시간에 구두 굽을 고치러 수선점에 갔다. 굽 아래에 박는 마개만 바꾸려했는데, 너무 오래된 신발이라 아예 굽을 갈고 바닥도 새로 까는 편이 좋겠다고 하셔서 신발을 맡기고 앉아있었다. 가열해서 신발을 늘려 굽을 빼내고 본드를 바르고 잠시 밖에 말린 뒤 붙이고 오려내고 다시 말리는 과정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나는 30분이 넘게 기다려야했다. 내가 앉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근처의 직장인들이 구두를 고치거나 닦으러 드나들었고, 아저씨는 내 신발을 고치는 사이사이 10켤레쯤 되는 구두를 닦고 고쳤다. 더러워졌다던지 굽 속의 쇠가 부러졌다던지 밑창이 떨어졌다던지 굽이 닳았다던지 하는 각양각색의 문제점을 지닌 신발을 들고 20명쯤 되는 사람들이 드나들었지만, 아저씨는 모든 문제의 답을 알고있었고 거기에 필요한 비용이 얼마인지도 정확하게 알고있었다.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성스러울 정도로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하리 할러가 층계참에 앉아서 남양삼나무를 지켜보는 일을 좋아했던 것 처럼, 난 구두수선집에 앉아있는게 좋다. 상자 같은 좁은 방에 앉아서 구두고치는 걸 지켜보고있을 때면 세상의 모든 걱정이 없어지면서 오로지 구두를 다시 온전하게 만드는 일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구두수선을 하는 분들은 대부분 수년, 또는 수십년간 그 일을 계속해온 분들이 대부분이라 '신발'이라는 존재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문제의 경우의 수를 알고있으며 그 어떤 구두를 고칠 때에도 오로지 그 구두에만 집중해서 결국엔 완전하게 고쳐낸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 정도로 엉망인 신발을 가져가면 창피하지 않을까' 같은 걱정을 하기도 하지만 구둣방 아저씨들은 그 어떤 구두에도 편견을 갖지 않는다. 그렇게 작은 방에 앉아 완전히 자기 일에 몰두해서 결국에는 그 문제를 해결해낼 것이 분명한 사람의 프로세스를 지켜보는 일은 아무리 다시 봐도 흥미롭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가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게 된다.

by Jaya | 2008/10/31 13:48 | | 트랙백 | 덧글(9)
Commented by 김은혜 at 2008/10/31 22:14
남삼양나무는 무얼까. 궁굼해 'ㅂ'
Commented by Jaya at 2008/11/01 16:52
앗, 너의 덧글을 보고 오타였음을 깨닫고 수정했다. 남양삼나무야ㅋㅋ
Commented by 미Zruk at 2008/11/01 01:27
내가 완전히 망가진 구두를 가져갔을 때 구둣방 아주머니의 표정이 새삼 떠오르네요.
Commented by Jaya at 2008/11/01 16:56
님하는 얼런 단화부터 사여
Commented at 2008/11/01 16:4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Jaya at 2008/11/01 16:59
운명인가봐요! 히히. 좋다는 말로는 충분치 않을만큼 좋아요, 이책.
Commented by 딴짓쟁이 at 2008/11/07 19:52
읏... 난 구두굽 갈아본적이없어서 저렇게 여러개를 동시에 고치는줄은 몰랐네ㅋ
전에 아주좁은 구두방한칸(박스같은식의 구두방)문을 열었는데 온통 신발들에 둘러쌓인아저씨가 한가운데 앉으셔서 문쪽을보고 짜장면을 드시고계시다가 문이열리니 나와 정면으로 마주쳤는데 기분이 참 묘하고 죄송해서 다시 닫아드릴까 생각했다는;;
Commented by 딴짓쟁이 at 2008/11/07 20:02
아 요즘 나에게도 할러에게처럼 춤을 가르쳐줄사람이 필요해...
Commented by Jaya at 2008/11/09 00:05
베를린에서 배울까. 우습게도 정말 하루 아침에 배워버리게 될 수도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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